타이츠가 민망해

기사작성 : 2017-12-21 16:34

타이츠만 입고 달려도 될까?
타이츠 위에 팬츠를 입어야 할까?
아, 어떡하지?

본문


나는 한 달에 한, 두 번쯤 동네 공터와 운동장을 달리는 초보 러너다. 러닝 타이츠와 전문 러닝화가 아닌 헐렁한 등산바지와 운동화 그리고 원색의 바람막이가 주류를 이루는 동네 러너란 거다. 아웃도어 의류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홀로 타이츠만 입고 달리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아줌마, 아저씨들의, 어린 여대생이나 여고생들의 뜨거운 시선을 견뎌야 하니까. (남고생도...)

한 번은 나도 러닝 매거진 속 멋진 모델을 보고 약간의 패턴이 들어간 타이츠를 구매한 적이 있다. 일반 타이츠보다 두툼한 재질에 단단함까지 느껴지는 신축성이 일품이었다. 타이츠를 계산하던 점원은 이 타이츠는 하체 라인이 심하게 드러나지 않는, 단독으로 입는 제품이라고 소개했다.

새 타이츠를 산 저녁, 나는 흰색 티셔츠와 타이츠만 입고 집을 나섰다. 약간 부끄러웠지만 효과적인 러닝과 세련된 스타일을 위해서라면 견딜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놀라운 해방감이라니. (팬츠를 위에 입었을 땐 결코 느낄 수 없는 그런) 요즘 남자 러너들이 타이츠만 착용한 채 러닝을 하는 이유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무모했던 용기는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동네 공터로 가기 위해 올라탄 엘리베이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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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처럼 이어폰을 귀에 꽂고 1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조금 내려갔을까, 7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7층에 사는 예쁜 아가씨(모 항공사 스튜어디스다. 우리 아파트 단지 내에서 가장 예쁘지 않을까 싶다.)가 승무원복을 입고 한 손엔 여행용 캐리어, 다른 한 손엔 가방을 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최대한 친절하고 우아하게 양쪽 입가를 올린 채 눈을 마주쳤다. 문이 닫히지 않게 열림 버튼을 누르는 건 기본 매너. 그녀는 얼굴만큼 예쁜 미소로 화답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문이 닫혔다. 나는 그녀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고 이어폰을 귀에서 뺀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출근, 하시나 봐요?”
“네, 비행이 있어요.”

그 말을 한 후 다음 말을 이어나갈 새도 없이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1층. 문이 열렸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지각인가? 원래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나는 그녀가 왜 그렇게 말도 없이 가버렸는지 알 수 있었다. 전신 거울에 비친, 내, 이렇게 툭, 튀어, 아 뭐라고 정확하게 말하기 민망한 그런, 아.

타이츠만 입었을 때 느낄 수 있었던 해방감과 상쾌함은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분명 옷을 입고 있지만 발가벗은 느낌. 앞으로 7층의 그녀와는 결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안녕, 아름다운 그녀. 앞으로 당신은 저를 보면 늘 시선을 피하겠죠.)

몸의 굴곡이 모두 드러나는 타이츠와 티셔츠 한 장만 입고 달리는 멋쟁이 러너가 되려면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날이었다. 특히 학교 운동장이나 공터에서만 달리는 나 같은 동네 러너에게는 더욱 그렇다.

나는 수줍은 초보 러너다. 언젠가 타이츠만 입고 달리는 러너들이 많은 한강이나 남산에 간다면 조용히 팬츠를 벗고 달릴 용기가 있다. 하지만 내가 달리는 곳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옆집, 윗집 사람들인 곳. 그리고 여전히 아웃도어 의류가 최신 트렌드인 곳. 타이츠만 입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해방감과 상쾌함을 즐기기엔 아직 이른, 이곳은 동네 작은 공터. 나는 내 아름다운(?) 몸의 굴곡을 가린 채 타이츠 위에 팬츠를 입고 달리는 부끄러움 많은 동네 러너다.



일러스트=이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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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by 김지윤

러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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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너스월드 코리아> 2018 4월호


크리스 모코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트레일 러너가 됐다
러너라면 발가락 유연성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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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허들선수 정혜림 & 김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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