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하고 무용하게

기사작성 : 2019-02-21 15:07

우리에게는 각자의 '골드버그 장치'가 있다. 거창하지만 쓸 데 없는 그런 것들.

본문


후회하게 될 줄 알면서도 자꾸 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 밤에 먹는 라면이 그렇고, 당장 읽지도 않을 거면서 우선 사들이고 보는 신간도서들이 그렇고, 전날의 과음이라든지, 그런 자리에서는 꼭 말이 많아져서 하지 않아도 되는 말도 많이 하게 되는데 다음날은 어김없이 숙취와 수치심으로 고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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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내게는 원고 마감이 그렇다. 후회할 줄 알면서도 자꾸만 미루게 된다. 그러다가 약속한 날짜에 당장 임박해서야 다음에는 미리 써두자, 놀지 말고 그러자, 어제의 유흥하던 내가 몹시 미워지고 원망스럽고 그렇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니면 나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의 재능을 십분 활용하게 되는데 아주 디테일하고 그럴 듯한 사고와 사건들을 공들여 구상했다. 예를 들어 입원을 요하지만 수술까지는 필요 없는 적당하게 심각한 질병에서부터 혈육 간의 끈끈함을 과시하는 경조사, 아니면 소송과 분쟁 같은 당장 쓰지 못할 인과적이고 서사적인 이유들을 발명해냈다.

물론, 그 시간에 한 줄이라도 더 쓰는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 구구절절하고 세밀한 사과의 문장들을 메일에 쓸 게 아니라 내 청탁 원고에 썼어야 했다. 그게 더 중요한 문제라는 걸 내가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뭐랄까, 그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알면서도 자꾸 그렇게 되어버린다.

그런데 그게 어디 나 하나뿐이었겠는가. 유능하고 노련한 편집자들의 답장에는 매번 나의 안부와 건강을 걱정하는 다정한 말들이 담겨 있었다. 환절기엔 감기를 여름엔 냉방병을 겨울엔 언 땅을 조심히 걸으라는 조언도 있었고,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갈수록 심각해지는 미세먼지와 호흡기를 걱정해주었다. 그러고는 어김없이 그 메일 말미에 이르러 “그럼 이틀 뒤에는 꼭 받을 수 있는 거겠죠?” 하고 묻는 그 질문이 실은 진짜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앞선 문장들이 실은 이 한 마디를 가리키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르는 게 아니다.

미국의 풍자만화가 루브 골드버그는 매우 단순한 작업을 위한 복잡한 기계 장치를 즐겨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골드버그의 만화 속 어떤 인물은 바나나 껍질과 막대기, 빨랫줄과 말발굽과 물뿌리개와 대걸레와 강아지 한 마리와 입간판 등을 이용해 고작 상가의 창문을 닦는다.
시작은 바나나 껍질이다. 길을 지나는 누군가 그것을 밟고 미끄러지면 함께 준비한 막대기도 밟게 된다. 막대기의 반대쪽 끝에는 말밥굽이 걸려있어서 공중으로 날아올라 허공에 매달아둔 빨랫줄에 걸리게 되고, 다시 그 무게로 인해 줄과 연결된 물을 가득 채운 물뿌리개가 흔들리며 움직인다. 그러면 그 아래 자고 있던 강아지가 화들짝 놀라 자리를 피하며 입간판을 넘어뜨린다. 간판은 다시 거꾸로 매달린 대걸레를 움직여 비로소 유리창을 닦게 되는데…… 이 무슨 <나홀로 집에>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냐고? 도대체 이런 비효율적인 장면을 무엇 하러 공들여 그림으로까지 그린 거냐고? 그런데 당신도 나도 이미 그런 존재들이지 않던가?

오늘날 ‘골드버그 장치’는 아주 거창하지만 어이없이 단순한 기계장치, 쓸데없이 정교한 일 등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그리고 1948년 퓰리처 만화상을 수상한 루브 골드버그는 다음과 말한다.
“내 만화는 인간의 놀라운 능력을 표현한 것이다. 아주 작은 결과를 얻기 위해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인간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비효율적인 것 투성이다. 나중에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너무 애쓰고 살았던 거 아닌가. 그러나 골드버그 장치에 숨은 재미는 그 결과를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바나나 껍질이 창문을 닦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우리는 정말 모른다. 무엇보다 아무도 우리의 삶을 골드버그의 만화처럼 한 눈에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스타트 라인에서 동일한 트랙을 달리는데도 좀처럼 지루해지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그런 거 아닌가. 이 끝에 도달한 내가 저기 저쪽 시작점의 나와는 어딘가 다른 내가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바로 그 기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번 연재 원고를 보내는 메일에 아래의 문장을 함께 적어둘 것이다.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다음에는 미리 써둘게요.”

물론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짐만은 자꾸 열심히 하게 된다. 그럼에도 시작이 중요하니까. 뭐랄까, 말하자면 골드버그의 저 바나나 껍질 같은 거? 뒤에 뭐가 올지 정말 모른다는 거?

소설가 임현은 러너입니다. 달리기에 관한 그의 소설같은 이야기에 빠져보세요!

ILLUSTRATION 잔 리보네(Janne Livo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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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by 임현

러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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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너스월드 코리아> 2019년 6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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